[기획컬럼 6부] 엔지니어링 목재와 LP판: 기술의 폭주를 막는 인간의 본성, 그 공존의 연대기

완벽하게 균일한 강도로 가공되어 아찔한 고층 빌딩까지 거뜬히 올려내는 ‘엔지니어링 목재(공학목재)’가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현대 건축과 공학은 자연이 가진 불규칙성을 더 이상 미덕으로 허용하지 않습니다. 플라스틱을 공장에서 사출하듯 규격화된 강도와 가벼움을 자로 잰 듯 완벽하게 계산해 내는 현대 과학 기술 앞에서, “나무가 혹독한 겨울을 버티느라 세포를 압축해 목질이 단단해졌네 마네” 하는 감상은 어쩌면 철 지난 낭만에 불과해 보일지도 모릅니다. 나뭇결이 엇나가고 크고 작은 옹이가 박힌 자연 그대로의 나무는 이제 건축 자재로서 가차 없이 불량품 취급을 받기 일쑤입니다.

자본주의와 결합한 효율성과 생산성이라는 일방통행 도로 위에서 자연의 날것이 가진 불완전함은 언제나 너무 쉽게 유죄 판결을 받습니다. 봄철의 억울한 누명으로 무참히 베어져 나간 버드나무나 아까시나무처럼, 기술의 잣대는 언제나 차갑고 명확합니다. 오로지 수치화할 수 있는 경제적 가치와 구조적 안전성, 그리고 투입 대비 산출의 극대화만이 살아남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참 신기한 일입니다. 세상의 모든 지식과 감각이 이토록 완벽한 0과 1의 디지털로 수렴해 갈수록, 인간의 마음 한구석에서는 삐뚤빼뚤한 원목의 옹이와 손때 묻은 나이테의 거친 질감을 지독하게 그리워합니다. 단 하나의 잡음 하나 없이 깨끗하고 청아한 초고음질 음원이 실시간으로 전 세계 어디서나 스트리밍되는 2026년 오늘날, 사람들이 굳이 먼지 섞인 지직거림이 가득한 무거운 LP판을 찾아 헤매는 모습은 꽤나 역설적입니다. 심지어 그것들이 최첨단 디지털 기기나 스트리밍 구독료보다 오히려 더 비싼 가격에 팔려나가는 기현상 역시, 원목을 그리워하는 우리의 심리와 정확히 같은 맥락일 것입니다. 편리를 위해 모든 것을 디지털화한 우리가, 왜 이 불편하고 불완전한 아날로그를 여전히 버리지 못하는 걸까요.

1. 나이테와 소리의 골: 불완전함이 주는 거친 위안

인간이 굳이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LP판을 턴테이블에 올리고 바늘을 얹는 일련의 행위는, 어쩌면 거친 바람과 추위를 견디며 자란 원목 가구의 표면을 찬찬히 매만지는 행위와 본질적으로 깊게 닮아 있습니다. 우리는 그 거칠고 투박한 질감 속에서 생명의 흔적과 시간의 묵직한 퇴적을 읽어냅니다.

LP의 검은 표면에 미세하게 파여 있는 ‘소리의 골’은 나무가 품고 있는 ‘나이테’와 완벽한 은유를 이룹니다. 사계절의 모진 풍파를 묵묵히 견디며 생존을 위해 세포를 압축하느라 삐뚤빼뚤하게 새겨진 나이테처럼, LP의 좁은 골에는 소리가 만들어지던 그 찰나의 순간의 공기와 연주자의 호흡, 그리고 세월의 흔적이 아날로그라는 거친 형태로 고스란히 박제되어 있습니다. 녹음실의 미세한 공기 떨림과 마이크에 부딪힌 숨소리마저 물리적인 홈으로 깎여 들어간 것입니다.

우리가 낡은 레코드판에 열광하는 것은 그것이 뇌 과학적으로나 음향학적으로 결점 하나 없는 완벽한 소리여서가 아닙니다. 지직거리는 그 노이즈마저도 “이것이 나의 지친 영혼에 진정한 위안을 줄 것”이라는 인간의 무의식적인 믿음이 강력하게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내 손으로 직접 커버를 벗겨 판을 고르고, 조심스레 바늘을 올리는 수고스러운 ‘경험의 입체성’이 편리함에 무뎌진 인간의 촉각적 본성을 건드리기 때문입니다. 매끄럽고 차가운 화학 공정의 합판 가구에서는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세월의 무게를 원목에서 느끼듯, 우리는 LP의 지직거리는 잡음 속에서 비로소 인간적인 숨통을 틔웁니다. 완벽하게 탈색된 무균실 같은 디지털 세계에서, 약간의 먼지와 잡음은 우리 자신이 불완전한 존재임을 긍정하게 만드는 묘한 치유력을 지닙니다.

2. 직선으로만 가지 않는 세상의 균형추

인류의 거대한 발전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세상의 발전은 결코 한쪽 방향으로만 브레이크 없이 폭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새로운 기술과 혁신은 인간의 삶을 비약적으로 더 편리하게 만들고 세계를 넓게 확장해 주지만, 인간의 무의식 한편에서는 귀신같이 닻을 내리고 옛것의 따뜻한 감성을 보존하려는 복원력이 동시에 작용합니다. 작용이 있으면 필연적으로 반작용이 따르듯, 기술의 극단적 진보는 아날로그를 향한 인간의 극단적 회귀 본능을 깨워냅니다.

예컨대 시속 수백 킬로미터의 초고속 열차가 전국을 단 몇 시간 만에 주파하는 극강의 효율의 시대에, 사람들은 주말이면 일부러 무궁화호나 느린 간이역 투어를 떠나며 시간을 기꺼이 낭비합니다. 강철보다 튼튼한 공학목재가 마천루 같은 빌딩을 빠르고 견고하게 세우는 동안, 사람들은 거실 한구석엔 거친 원목 탁자를 굳이 비싼 돈을 주고 들여놓으려 애씁니다. 이것은 최첨단 기술에 밀려난 자들의 뒤늦고 부질없는 집착이 결코 아닙니다. 숨 막히는 효율의 쳇바퀴 속에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생존을 위해 스스로 본능적으로 찾아내는 일종의 ‘감성의 균형추’입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기에, 끝없는 효율의 압박을 견디기 위해서는 반드시 비효율이 허락하는 낭만의 시공간이 필요합니다.

마무리

기술은 세상을 앞으로 밀고 나가고, 감성은 우리가 돌아갈 고향을 지킨다.

결국 인간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이 세상은, 혁신이라는 날카로운 창과 아날로그라는 따뜻한 방패라는 두 가지 이질적인 축이 톱니바퀴처럼 정밀하게 맞물려 전진하는 거대한 공존의 현장입니다. 아날로그 감성이 첨단 기술이 지배하는 시대에도 여전히 살아 숨 쉬는 이유는, 인간의 복잡한 본성이 차가운 효율성만으로는 결코 채워질 수 없음을 우리 스스로 끊임없이 증명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한쪽이 텅 비어버리면 다른 한쪽으로 급격히 기울어 무너지는 것이 인간의 위태로운 정신입니다. 오늘도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완벽한 네비게이션의 안내를 받으며 고속도로를 달리면서도, 마음은 어릴 적 아카시아나무 잎을 무심히 뜯던 골목길의 낡은 향수를 쫓는 우리 모두의 모습처럼 말입니다. 기술이 우리를 아무리 낯선 우주로 데려간다 해도, 인간의 영혼은 언제나 거칠고 따뜻한 흙냄새를 갈망하며 회귀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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