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컬럼 4부] 인간의 무의식과 기억의 왜곡, 그리고 통제가 빼앗아 간 아날로그 놀이터

창밖에 낮게 깔린 산안개를 헤치며 도로를 달리다 보면, 우리의 뇌는 종종 자연스럽게 시공간을 거스르는 타임머신에 탑승하게 된다. 어릴 적 장마 끝자락에 가족들과 떠나던 설악산의 서늘한 공기, 그리고 빗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고속도로 휴게소 처마 밑에서 후루룩 들이켜던 뜨끈한 가락국수 한 그릇의 냄새 같은 것들이 불쑥 코끝을 스치곤 한다. 그런데 최근 내 기억의 저장고를 찬찬히 뒤적이다가 무척이나 흥미로운 인지적 오류 하나를 발견했다. 내 머릿속에는 기차가 대전역에 정차한 짧은 10분 남짓한 시간 동안, 플랫폼으로 잽싸게 뛰어 내려가 쑥갓과 유부가 투박하게 썰려 들어간 가락국수를 폭풍처럼 흡입했던 아주 선명한 장면이 재생된다. 에어컨도 없던 후덥지근한 그 시절,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닦으며 들이켜던 짭조름한 국물 맛까지 생생할 지경이다. 하지만 냉정하게 과거의 연대표를 따져보면, 저는 어릴 적 경상도나 전라도 깊숙한 곳으로 기차를 타고 갈 일이 거의 없었던 사람이다. 주로 고속버스를 타고 이동했었다. 도대체 이 생생한 기억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1. 뇌라는 이름의 낭만적 편집자, 기억의 재구성

심리학자들의 오랜 연구가 증명하듯, 인간의 기억은 한 번 녹화되면 영원히 변하지 않는 CCTV 영상이 아니다. 오히려 언제든 내용을 덧붙이고 입맛에 맞게 수정할 수 있는 위키피디아(Wikipedia) 문서에 가깝다. 알고 보니 저의 이 선명한 대전역 가락국수 기억은, 어릴 적 어머니가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려주셨던 ‘대전역 플랫폼의 낭만’이라는 청각적 정보에, 제가 실제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국수를 먹으며 느꼈던 시각적, 미각적 경험이 뇌 속에서 자석처럼 들러붙어 재조합된 ‘기억의 왜곡(False Memory)’이었다. 컴퓨터라면 코드가 단단히 꼬인 치명적인 에러라고 경고창을 띄웠겠지만, 인간의 무의식은 이처럼 영리하고도 낭만적이다. 자신이 가장 기억하고 싶은 따뜻하고 설레던 시절의 조각들을 정교하게 기어 맞춰, 세상에서 가장 완벽하고 맛있는 ‘인생 국수’ 한 그릇을 마음속에 거뜬히 창조해 내니까 말이다.

2. 획일화가 거세해버린 공간의 영혼

이 정겨운 기억의 오류를 더듬다 보면 자연스럽게 요즘의 고속도로 휴게소로 시선이 가닿게 된다. 솔직하고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요즘 휴게소 음식들은 참으로 재미가 없다. 미각적인 ‘맛’이 없는 것이 아니라, 공간이 주던 ‘경험적 카타르시스’가 증발해버린 듯하다. 과거의 휴게소들은 지금처럼 대기업의 거대한 프랜차이즈 자본이나 중앙집중식 식자재 유통 시스템(Central Kitchen)이 장악하기 전이었다. 휴게소 뒷방 주방에서 아주머니들이 밤새 끓여낸 육수를 퍼 담고, 투박하게 썰어낸 파를 얹어주던 오리지널리티가 살아 숨 쉬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의 습한 공기, 휴게소마다 미세하게 달랐던 짠맛의 농도, 심지어 무심하게 그릇을 던져주던 주방 아주머니의 표정까지 어우러져 그 음식은 하나의 ‘완벽한 장소적 경험’을 완성했다. 하지만 지금은 전국의 어느 휴게소를 가든 대형 식품 공장에서 위생적으로 깔끔하게 패키징되어 내려온 똑같은 소스와 똑같은 냉동 면을 마주하게 된다. 대량 생산과 위생의 상향 평준화라는 편리함을 얻은 대신, 그 휴게소만이 지니고 있던 고유한 영혼과 낭만은 가차 없이 가위질당하고 말았다.

3. 결벽증에 걸린 도시와 억울한 누명을 쓴 아까시나무

우리가 편리함과 효율성의 이름으로 밀어버린 것은 비단 휴게소의 가락국수뿐만이 아니다. 어릴 적 주택가가 밀집한 골목길을 걷다 보면 흔하게 마주하던 풍경이 있었다. 해가 쨍쨍한 날임에도 버드나무 밑을 지나갈 때면 무언가 미세한 물방울이 머리 위로 떨어지던 묘한 감각. 훗날 그것이 나무에 달라붙은 진딧물들의 당분 섞인 배설물, 즉 ‘감로(Honey dew)’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금의 도시 위생 기준이라면 “벌레가 꼬여 비위생적이다”라며 당장 구청에 민원을 넣고 전기톱으로 베어버렸겠지만, 그 시절 골목길의 생태계는 알아서 무던하게 굴러갔었다. 인간이 농약을 치지 않아도 무당벌레가 날아와 진딧물을 먹어 치우며 스스로 자정작용을 거쳤다. 인간의 섣부른 오만이 만들어낸 억울한 누명의 대표 주자는 단연 ‘아까시나무(아카시아)’다. 한동안 산림청은 아까시나무를 소나무를 말라 죽게 하는 악당으로 몰아세우며 벌목을 감행했지만, 진범은 보이지 않는 재선충이 퍼뜨린 전염병이었다. 아까시나무는 콩과 식물답게 공기 중의 질소를 비료로 바꾸어 전쟁 직후 척박했던 땅을 기름지게 가꾸어 준 뒤, 토양이 비옥해지면 참나무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떠나는 위대한 ‘생태적 징검다리’였을 뿐이다.

4. 잎사귀 하나로 짓던 상상력의 성곽, 그리고 잃어버린 마음

아까시나무를 대대적으로 없앤다는 뉴스가 유독 가슴 아팠던 이유는, 그 나무가 나의 유년 시절 가장 찬란했던 아날로그 놀이터였기 때문이다. 초여름 향긋하게 핀 아카시아 흰 꽃의 달콤한 밑동을 씹어 먹으며 하교를 했고, 나비 날개처럼 대칭으로 마주 난 잎줄기를 꺾어 들고 친구와 마주 앉았다. “가위, 바위, 보!” 경쾌한 외침과 함께 이긴 사람은 잎사귀를 하나씩 튕겨 쳐냈고, 앙상하게 남은 줄기는 양쪽 눈꺼풀 사이에 끼워 넣어 기괴하고 우스꽝스러운 ‘도깨비 눈’을 만들었다. 스마트폰이 없어도, 거울이 없어도, 기괴하게 변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배가 끊어지도록 자지러지게 웃어대던 그 천진난만한 축제의 시간들. 오늘날의 아이들은 액정 속 정교한 디지털 그래픽을 보며 자라지만, 우리는 초록색 잎사귀 하나만 있어도 온종일 지루할 틈 없이 완벽한 우주를 유영했었다. 결국 위생과 효율성이라는 차가운 잣대로 골목길의 생명들을 밀어버린 지금, 우리가 정말로 잃어버린 것은 단순한 나무 한 그루가 아니라 잎사귀 하나로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해할 줄 알았던 그 시절의 넉넉하고 순수한 마음일 것이다. 통제가 극에 달한 지금, 우리는 역설적이게도 그 불편하고 불완전했던 시절의 영혼 깃든 풍경들을 사무치게 그리워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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